나의 양심 - 성경과 꾸란의 아담·하와 차이점
“남의 눈은 속여도 제 눈은 속일 수 없다.”
나는 늘 이 말을 마음속에 새기며 살아왔다. 인간은 무엇보다 자기 안의 양심 앞에 정직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주일 미사와 평일 미사 참례를 하며 거의 매일 광안성당 마당을 밟는다.
내 발걸음이 아니라, 신앙심 깊은 아내의 발걸음을 따라 흘러 들어온 길이다. 성체조배, 레지오 회합, 파티마
쎌 기도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성당에 몸과 마음을 바치는 아내의 헌신적인 뒷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미안한 마음이 고개를 든다.
그 순간 깨닫는다. 신앙은 남 탓이 아니라,
내 나약함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을. “내 탓이오”라는 정직한 고백아야말로 양심의 위대한 첫걸음이다.
성경 속 아담은 죄를 짓고 나서 수풀에 숨으며 남 탓을 했다.
“당신이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어서 제가 먹었습니다.” (창세기 3:12)
그러나 꾸란 속 아담은 다그치기도 전에 곧바로 자신들의 탓을 고백했다.
“저희의 주님, 저희는 저희 자신에게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당신께서 저희를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풀지 않으신다면 저희는 실로 파멸하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꾸란 7:23)
숨지 않고 정직하게 고백하는 용기, 그것이 성경과 꾸란이 공통으로 강조하는 벌거벗은 양심의 모습이다.
꾸란은 지금까지도 7세기 고전 아랍어 원전을 고집한다. 언어의 본질과 계시의 원형을 지키려는 엄격한 태도다.
흥미롭게도 조선의 세종대왕 역시 어전에서 이슬람교도들이 아랍어로 꾸란을 암송하던 소리를 편견 없이 귀담아들었다는 기록이 실록에 전해진다.
세상의 모든 낯선 소리를 포용했던 세종의 열린 귀가 있었기에, 백성의 정직한 말소리를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 적는 ‘훈민정음’이라는 위대한 기적이 태어날 수 있었었던 것이리라.
언어와 문자, 종교의 껍데기를 넘어, 결국 본질은 하느님 앞에 서는 정직한 양심의 목소리다
이슬람에도 악기 없이 목소리로만 부르는 ‘나쉬드(Nasheed)’라는 아름다운 성가가 있다. 그중에서도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는 단골곡 ‘쿤 안타(Kun Anta, 너 자신이 되어라)’는 온갖 사회적 감투와 완장 같은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하느님 앞에 정직한 양심으로 서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가톨릭의 성가, 개신교의 찬송가, 이슬람의 나쉬드 모두 결국 같은 노래를 부르는 셈이다. 벌거벗은 양심으로 주님을 마주하려는 영혼의 깊은 헤엄이다.
내면을 비추는 두 경전의 거울
- 성경: "선한 양심을 가지라." (베드로전서 3:16)
- 꾸란: "자책하는 영혼을 두고 맹세하노니..." (꾸란 75:2)
- 성경: "율법을 가지지 않은 이방인이 본성에 따라 율법의 요구를 실천하면..." (로마서 2:14)
- 꾸란: "종교에는 강제가 없나니..." (꾸란 2:256)
- 성경: 죄를 짓고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아담 (창세기 3:8)
- 꾸란: 핑계를 대지 않고 곧바로 "우리 자신을 잘못하였습니다" 고백한 아담 (꾸란 7:23)

가톨릭의 성가, 개신교의 찬송가, 이슬람의 나쉬드 모두 결국 같은 노래를 부른다.
벌거벗은 양심으로 주님을 마주하려는 영혼의 노래다.
🎵 영혼의 노래: 성경–꾸란 성가 (Suno 버전)
(Verse 1)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네 (시편 16:7)
하느님 앞에 벌거벗은 채 정직하게 서리라
남의 탓 비겁한 변명은 모두 묻어두고
내 탓이라 고백하며 주님께 나아가리
빛 되신 주님, 내 눈을 밝혀 길을 인도하시네
(Chorus)
양심 따라 주님을 찬양해!
양심 따라 주님을 섬기네!
껍데기를 벗어던진 온전한 영혼으로
기쁨의 노래 부르며 주님께 나아가리
(Verse 2)
나는 평생 양심을 따라 하느님을 섬겼네 (사도행전 23:1)
부끄러운 나약함에 자책하는 영혼도 (꾸란 75:2)
"우리 자신을 잘못하였습니다" 고백하는 참회 속에 (꾸란 7:23)
새롭게 피어나는 사랑의 노래로 주님께 고백하리
🛣️ Journey of Reflection
글을 맺으며
신앙이란 어쩌면 깊은 강물 속에서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손발을 저으며 뭍을 향해 나아가는 거룩한 헤엄입니다.
44년 전 아내의 손을 잡고 들어온 이 길은 결국 '내 탓'이며, 내 나약함을 인정하는 고귀한 시작이었습니다.
문득 1839년 기해박해의 서슬 퍼런 칼날 앞에서도 벌거벗은 양심으로 하느님을 증거했던 성 정하상 바오로의 상재상서(上宰相書)를 떠올립니다.
세상의 감투나 목숨이라는 가장 큰 껍데기마저 벗어던지고 오직 상재(하느님) 앞에 정직하고자 했던 그 위대한 울림이,
오늘날 내가 밟는 광안성당 마당에도 고요히 흐르고 있음을 느낍니다.
이제 성전 문밖의 어슬렁거림을 멈추고,
아내의 손을 꼭 잡은 채 성전 안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아 딱 5분만 숨을 골라보려 합니다.
거창한 기도는 몰라도, 내 안의 정직한 영을 마주하는 그 고요한 시간. 감실 안의 그분도, 사랑하는 아내도,
그리고 상재상서의 서슬 퍼런 양심을 지켜낸 선조들도 이 정직한 헤엄을 미소로 지켜봐 주시리라 믿습니다.
코란
코란 [Koran] 이슬람교의 경전(經典)으로,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610년 아라비아 반도 메카 근교의 히라(Hira) 산 동굴에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처음으로 유일신 알라의 계시를 받은 뒤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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