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의 제자 세족례(洗足禮)에 대한 소고 : 머리의 지성에서 발바닥의 영성으로
지난번 부산 광안성당 장대골 성지를 걸으며, 물리학의 후크의 법칙을 빌려 '십자가의 길은 곧 발바닥의 길(Via Crucis, Via Pedum)'이라는 묵상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머리로 계산하는 차가운 지식은 작은 시련에도 쉽게 부러지지만, 진흙을 묻히며 걸어가는 정직한 발바닥에는 쓰러질지언정 다시 일어서는 영적 탄성이 존재한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그 사색의 연장선상에서, 문득 그리스도께서 수난 전날 밤 몸소 그 '발바닥의 길'을 시각적으로 보여주셨던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요한복음 13장의 세족례(洗足禮)입니다.
복음서의 파격, 무릎 꿇은 창조주
공관복음(마태오·마르코·루카)이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성체성사'의 제정에 집중할 때, 요한복음은 독특하게도 스승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파격적인 장면에 주목합니다.
당대 유대 사회에서 먼지와 오물로 가득한 타인의 발을 씻기는 일은 오직 이방인 노예나 종들의 몫이었습니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조차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이냐"를 두고 세속적 권력 투쟁을 벌이던 제자들 앞에서, 예수는 가만히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이는 자신의 신성(Divinity)을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비하, 즉 케노시스(Kenosis, 자기를 비움)의 선언이었습니다. 높은 보좌에 앉아 머리로 지배하는 세상의 통치 방식을 거부하고, 가장 낮은 곳에서 타인의 발바닥을 닦아주는 '종의 리더십'을 몸소 증명하신 것입니다.
Calculus mentis(머리의 계산)를 허무는 발바닥의 실천
베드로는 스승이 무릎을 꿇자 당황하여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라며 이성적인 예의를 차리려 합니다.
이에 예수는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고 단호하게 답하십니다.
여기서 발을 씻기는 행위는 단순한 도덕적 퍼포먼스가 아닙니다.
주님의 조건 없는 사랑과 용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낮아짐의 수용'이 선행될 때 비로소 그리스도와 신비적 일치를 이룰 수 있다는 구원론적 선언입니다.
제단 위에서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전례가 우리의 지성과 마음을 고양한다면, 세족례는 그 은총이 세상의 거친 땅 위로 나아가 이웃의 아픔을 닦아내는 행동으로 번역되어야 함을 역설합니다.
머리의 계산(Calculus mentis)은 온통 세상을 오염시키고 교만이라는 겉치레 속에 길을 잃게 만들지만, 진흙 묻은 발바닥(Vestigium pedis)은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공을 초월한 진리: 유교와 이슬람의 문을 열다
흥미롭게도 머리의 지성을 내려놓고 발바닥의 실천을 강조하는 이 영성은 기독교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동양의 유학(儒學)과 사막의 성서 《꾸란》 역시 시공간을 초월하여 정확히 같은 자리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동양 사상의 뼈대를 세운 《논어(論語)》 학이(學而) 편의 첫 구절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여기서 익힐 습(習) 자는 어린 새(羽)가 날기 위해 하얀(白) 허공 속에서 끊임없이 날개 정령을 퍼덕이는 역동적인 몸짓을 뜻합니다.
즉, 공자가 말한 기쁨은 책상 앞의 예습·복습이 아니라, 배운 도리를 내 삶의 현장에서 '발로 뛰며 몸소 실천해 낼 때' 밀려오는 영적인 희열인 것입니다.
저 멀리 사막에서 탄생한 이슬람의 성서 《꾸란(Qur'an)》 또한 관념적 믿음에 머무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며, 오직 행동과 실천을 통해서만 신앙이 완성된다고 가르칩니다.
"إِنَّ الَّذِينَ آمَنُوا وَعَمِلُوا الصَّالِحَاتِ" (인날 라디나 아마누 와 아밀루스 사리하트)
-"실로 믿음을 갖고 선행을 실천하는 자들..." (꾸란 제19장 96절)
꾸란에서 가장 자주 반복되는 이 관용구는 고백으로서의 믿음과 실천으로서의 선행을 결코 분리하지 않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성경의 선언이나, 발바닥으로 증명하라는 세족례의 메시지는 이처럼 인류 문명의 위대한 경전들 속에서 완벽하게 맥을 같이합니다.
내세의 문턱에서 만날 주님의 '발검사'
다시 세족례의 밤으로 돌아와, 문득 그런 발칙하고도 유쾌한 상상을 해봅니다.
언젠가 이 지상의 삶을 마치고 내세의 문턱을 넘어 주님을 조우하는 심판의 날,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실까요?
우리는 흔히 세상에서 쌓아 올린 화려한 업적, 높은 직분, 혹은 수많은 종교적 지식을 적은 '이성의 계산서'를 양손 가득 들고 가 주님께 보여드리려 할지 모릅니다.
"주님, 제가 머리로 이만큼 계산해서 이만큼 대단한 일을 했습니다"라며 깨끗한 손을 내밀겠지요.
하지만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그 주님이라면, 심판정에서 뜻밖의 제안을 하실 것 같습니다.
"얘야, 손은 치우고 어디 '발검사' 한 번 해보자."
대야에 물을 떠 오신 주님 앞에서 우리는 발바닥을 보여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때 내 발바닥이 너무 매끈하고 깨끗하다면 도리어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발은 세상의 안락의자에만 앉아 있던 깨끗한 발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눈물 곁에 머물고, 상처받은 이웃을 향해 부지런히 걸어가느라 굳은살이 박이고 진흙이 묻은 투박한 발바닥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꾸란》 야씬(Ya-Sin) 장에서도 최후의 심판 날 인간의 입은 봉해지고, 오직 그가 걸어온 '발'이 직접 증언할 것이라고 엄숙하게 선언합니다.
"الْيَوْمَ نَخْتِمُ عَلَىٰ أَفْوَاهِهِمْ وَتُكَلِّمُنَا أَيْدِيهِمْ وَتَشْهَدُ أَرْجُلُهُم بِمَا كَانُوا يَكْسِبُونَ"
-"그날 우리는 그들의 입을 봉할 것이라. 대신 그들의 손이 우리에게 말할 것이며, 그들의 발은 그들이 지상에서 걸으며 행했던 바를 증언하리라." (꾸란 제36장 65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하늘의 문턱을 넘는 유일한 통행증은 머리의 계산서가 아니라 먼지 묻은 발바닥의 굳은살인 모양입니다.
숫자에 갇힌 신앙이 아니라, 한 걸음의 실천으로
Calculus mentis corrumpit, vestigium pedis purificat.
(이성의 계산을 멈추고, 순수한 사랑의 걸음을 걷게 하소서)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처럼, 우리 역시 지식의 성벽을 허물고 낮은 곳으로 향해야 합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주님께 부끄럽지 않은 '정직한 발자국'을 보여드릴 수 있도록, 계산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행동하는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길 기도합니다.
비아 페둠(Via Pedum), 즉 '발바닥의 길'을 통해 계산적인 신앙이 아닌 실천적인 삶을 살아가자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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