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로와 차선, 그리고 삶의 주행 -예연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차량은 결코 하나의 차로만 고집하지 않는다.
도로교통법은 차로와 차선을 엄격히 구분한다.
자동차가 달리는 물리적인 공간은 '차로'이며, '차선'은 그 차로와 차로를 구분하기 위해 바닥에 그려진 단순한 선일 뿐이다. 차선은 통행을 막아서는 벽이 아니라, 오히려 차로와 차로 사이를 안전하게 넘나들며 목적지까지 주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유연한 기준선이다.
내 삶의 여정 역시 두 개의 차로를 유연하게 달리는 과정이었다. 낮 동안 철저한 이성과 과학적 수치로 부실에 맞서던 '공돌이'의 삶이 하나의 차로였다면, 저녁 6시 성당의 종소리와 함께 진입하는 신앙의 삶은 또 다른 차로이다.
돌아보면 내 삶의 한 축은 철저히 기계쟁이의 정밀함과 이성의 차선 위에 있었다. 1995년 허허벌판 공장 터에서 돋보기를 쓰고 밤새 시방서를 파헤치던 시절이 그랬다.
기원전 400년경 미신을 걷어내고 과학적 학습의 기초를 세운 히포크라테스처럼, 나 역시 원칙과 수치로 부실에 맞서며 한 치의 틈도 없는 '무수축의 나날들'을 통과해 왔다. 그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단단한 이성의 차로였다.
그러나 해가 저물고 저녁 6시 성당의 미사 종소리가 울릴 때, 나의 시간 함수 \(f(t)\)는 신앙이라는 영성의 차선으로 부드럽게 진입한다. 이어지는 7시 파티마 성모 발현 기도회에서 묵주알을 굴리는 시간은, 낮 동안 팽팽했던 이성의 긴장을 내려놓고 초자연적인 은총과 평화로 영혼을 채우는 시간이다.
이성과 신앙이라는 두 차로 사이에서, 차선은 두 세계를 단절시키는 벽이 아니다. 오히려 충돌 없이 두 공간을 유연하게 오가며 영혼의 균형을 잡게 해주는 고마운 가이드라인이다. 이 두 차로의 조화 속에서 내 삶은 한 치의 빈틈도 없는 '무수축'의 평화를 완성한다
어떤 이들은 과학적 이성과 종교적 신앙이 서로 충돌하는 벽이라고 말하지만, 나에게 그것은 유연하게 넘나들며 조화를 이루는 두 개의 차선일 뿐이다. 이성이 삶의 뼈대를 단단하게 세운다면, 신앙은 그 뼈대 위에 따뜻한 은총의 살을 붙인다. 이 두 차선이 충돌 없이 유연하게 맞물릴 때, 비로소 인간의 실존은 한 치의 빈틈(수축)도 없이 완전해진다.
오늘도 생일 케이크 앞에서 촛불을 독차지하려 초등학교 1학년 큰 손자와 4살 짜리 둘째 손자 모습이 눈에 선하다.
11년 뒤인 2037년, 19년 메톤 주기를 따라 아내와 나의 공동 생일이 돌아오는 그 찬란한 날에 이 녀석들 큰 놈은 의젓한 대학 신입생이 되어 내 앞에 앉아 있을 것이고 둘째는 고등학생이 될 것이다.
그때 스무 살 청년이 된 손자에게 술 한 잔 건네며 이 할아버지가 다져온 주행법을 들려주고 싶다. 세상이 그어놓은 편견과 고정관념의 차선에 갇혀 장벽을 만들지 말라고. 이성의 날카로움과 영성의 유연함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네 인생의 목적지를 향해 충돌 없이 당당하게 주행하라고 말이다.
저녁 미사로 향하는 길, 오늘 나의 시간은 이성과 은총이 맞물린 평화 속에 고요히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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