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hoes of Thought/Shared Voices

탱크를 탱크라고 부를 수 없는 사회, 그것은 건강한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다.

砅涓 鄭承衍 2026. 5. 26.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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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이다. 나는 아내와 함께 집 근처 스타벅스로 천천히 걸어갔다. 커피 두 잔과 작은 텀블러 하나를 조용히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거창한 행동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평범한 소비였겠지만, 나에게 그것은 이재명 대통령과 민주당이 스타벅스 광고 논란을 계기로 5.18 민주화운동을 정치적 종교처럼 성역화하려는 광적인 흐름에 맞선, 내가 할 수 있는 작지만 조용한 무저항의 표현이었다.

 

요즘 세상은 마치 거대한 전시(戰時) 공간처럼 들끓고 있다. 분노는 순식간에 증폭되고, 침묵은 의심의 대상이 되며, 군중의 감정은 어느새 도덕과 정의의 이름으로 절대화된다. 특히 5·18을 둘러싼 정치적 감정은 점점 성역화와 종교화의 영역으로까지 번져가는 듯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스타벅스 안은 너무도 평온했다. 언론과 정치권이 만들어낸 격앙된 공기의 바깥에서, 그곳은 여전히 '일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 앉은 젊은이들은 이어폰을 낀 채 책을 읽고 있었고, 누군가는 노트북 앞에서 과제를 정리하고 있었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창밖을 바라보며 긴 침묵 속에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는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았다. 민주주의란 원래 이런 조용한 일상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닐까. 누군가의 분노를 강요받지 않고, 특정한 감정을 충성처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커피 한 잔을 마시는 평범한 시민의 평온한 일상까지 정치가 침범하지 않는 사회 말이다.

 

최근 신세계 정용진 회장의 스타벅스 코리아 '탱크 데이’ 사태를 보며 많은 국민들은 단순한 기업 논란 이상의 불편함과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기업의 부주의한 마케팅은 충분히 비판받을 수 있다. 5·18 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이며 민주주의 역사다. 희생자와 유가족의 아픔은 당연히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 벌어진 집단적 반응이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직접 공개 분노를 표출하고, 중앙부처 장관들까지 나서고, 여당 정치권이 총동원되며, 강성 지지층과 시민단체, 일부 언론까지 가세해 사실상 공개 응징 분위기가 형성됐다. 결국 대표이사 해임까지 이어졌다. 단순한 기업 실수 비판을 넘어 거의 정치적 린치에 가까운 집단 심리의 폭주처럼 보였다는 국민들도 적지 않다.

결국 많은 국민들의 머릿속에는 한 문장이 남았다.

 

“이제는 탱크를 탱크라고도 부를 수 없는 사회가 되어가는 것인가.”

물론 5·18의 역사적 상처는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특정 단어와 이미지 자체가 정치적 금기처럼 변하고, 그것에 대한 해석 권한이 특정 진영에 의해 독점되기 시작하면 사회는 점점 자유로운 시민사회보다 ‘정치적 신앙공동체’에 가까워진다.

특히 이재명 대통령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세 차례나 직접 스타벅스를 공개 비판했다. 단순한 유감 표명을 넘어 사실상 정치적 메시지에 가까운 강한 어조였다.

 

문제는 이런 방식의 공개 저격이 단순한 의견 표명을 넘어 거대한 정치 메시지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대통령의 언어는 일반 정치인의 언어와 다르다. 대통령이 특정 기업이나 사건을 공개적으로 지목하는 순간, 지지층·관료 조직·여당·시민단체·온라인 커뮤니티는 그것을 일종의 ‘행동 지침’처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과 중앙부처 장관들까지 나서 특정 민간기업을 사실상 공개 압박하는 장면 자체가 매우 이례적이라는 점이다. 정치권이 기업을 비판하는 일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정상적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국가 권력이 특정 기업을 상대로 집단적 압박 구조처럼 움직이는 모습 자체를 매우 위험하게 본다.

 

대통령과 정부의 공개 비판은 단순한 개인 감정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세무, 규제, 인허가, 금융, 투자, 노조, 여론, 시장 신뢰 등 모든 영역에서 막대한 압박으로 작동할 수 있다. 그래서 선진 민주주의 국가일수록 국가 권력은 특정 민간기업에 대한 공개 감정 개입을 극도로 자제한다.

 

오죽하면 보수와 진보를 넘어 원로 법조인으로 평가받는 이석연 국민통합위원장까지 최근 이재명 대통령에게 공개석상에서 사회 분열과 과도한 진영 대립에 대한 우려를 사실상 직언 형태로 전달할 정도였다. 그의 문제의식은 결국 하나다. 권력은 사회 분노를 증폭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과열된 사회를 냉각시키는 마지막 균형추여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1980년대 영국 워릭대에서 1년간 공부하며 영국을 구성하는 4개 지역 중 하나인 북아일랜드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 사건을 접하면서 국가 폭력의 기억이 어떻게 정치적 정체성과 결합하는지를 더욱 분명히 보게 되었다.

1972년 북아일랜드 데리(Derry)에서 영국 공수부대는 개신교도들이 아니라 가톨릭계 시민들의 민권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비무장 시위대에게 발포했고, 14명이 사망했다. 국가 권력이 시민 저항을 체제 위협으로 간주하며 무력 진압했다는 점에서 5·18과 구조적으로 상당히 유사하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피의 일요일'은 단순한 희생 사건을 넘어 북아일랜드 민족주의 진영의 핵심 정치 상징으로 변해갔다. 특히 신페인당(Sinn Féin) 등 정치세력은 이를 영국 국가폭력과 저항 정당성의 상징처럼 지속적으로 활용했다. 실제로 '피의 일요일' 추모 행사는 오랫동안 정치 동원과 정체성 정치의 핵심 공간이 되었고, 기억 자체가 정치적 충성의 기준처럼 작동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희생자 명예 회복과 인권 문제 제기라는 긍정적 기능도 있었다. 실제로 영국 정부는 오랜 논쟁 끝에 재조사를 실시했고, 2010년에는 당시 총리였던 데이비드 캐머런이 공식 사과까지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문제는 훨씬 복잡해졌다. '피의 일요일'은 단순한 역사 사건이 아니라 북아일랜드 정치 정체성의 핵심 상징으로 굳어졌다. 어떤 해석은 허용되고 어떤 표현은 금기시되기 시작했다. 추모와 기억은 점점 정치적 충성 경쟁과 결합했고, 반대 의견은 쉽게 “희생자 고통을 부정하는 세력”처럼 낙인찍혔다.

 

그 결과 북아일랜드 사회는 수십 년 동안 '기억 정치'(memory politics)와 정체성 전쟁 속에 갇혔다. 갈등은 세대를 넘어 재생산됐고, 사회 통합은 매우 늦어졌다. 오히려 사건의 지속적 정치화는 가톨릭과 개신교 공동체 사이의 상호 불신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실제로 최근까지도 '피의 일요일' 영상과 상징 사용을 둘러싼 정치 논란은 계속 반복되고 있다. 영국 정치권에서는 단순히 관련 영상이 사회관계망서비스에 사용된 것만으로도 거센 정치적 파장이 발생했고, 공개 사과까지 이어졌다. 그만큼 역사 기억이 여전히 현재 정치의 강력한 감정 자산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의미다.

 

바로 여기서 한국 사회는 매우 냉정하게 질문해야 한다. 5·18이 앞으로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물론 5·18 자체는 군부 권위주의 체제에 맞선 시민 저항과 국가 폭력의 역사였다. 그것은 존중받아야 한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소비하느냐에 있다.

 

만약 5·18이 특정 정치세력의 '독점적 정통성' 자산처럼 기능하기 시작하고, 특정 표현·단어·해석 자체를 금기시하며, 정치적 충성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처럼 사용되기 시작한다면 한국 사회 역시 북아일랜드식 기억 정치의 악순환에 빠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번 스타벅스 사태는 어쩌면 그 초기 징후일 수도 있다. 처음에는 단순한 기업 마케팅 실수 비판으로 시작된다. 이후 기업들은 스스로 검열하기 시작한다. 언론은 눈치를 본다. 학계와 문화계도 특정 역사 상징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기 어려워진다. 정치권은 점점 더 강한 정서 동원과 도덕적 분노를 필요로 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문제의 본질보다 “충분히 충성했는가”가 더 중요한 사회 분위기가 형성된다.

그 단계까지 가면 민주주의는 더 이상 자유로운 토론 체제가 아니다. 정치적 성역과 감정 동원이 지배하는 정체성 정치 체제로 이동하게 된다. 정치 종교의 특징은 토론 불가능성이다. 종교화된 정치 공간에서는 사실관계보다 신념 충성이 우선한다. 조금의 실수도 ‘모독’으로 해석된다. 비판은 허용되지 않고 의심은 배신으로 취급된다.

 

대한민국 헌법은 언론, 출판, 표현의 자유를 명시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민주주의에서 표현의 자유는 단순한 권리가 아니라 자유사회 유지의 최후 방어선이다. 국가 권력과 정치 다수가 특정 표현·단어·상징에 대해 사실상 금기 분위기를 조성하기 시작하면 시민들은 법적 처벌 이전에 사회적 처벌과 낙인을 먼저 두려워하게 된다.

 

문제는 바로 그 순간부터다. 사람들은 스스로 검열하기 시작하고, 자유로운 토론은 위축되며, 결국 헌법이 보장한 표현의 자유는 형식만 남게 된다. 헌법 위반은 반드시 법률 조항의 직접적 강제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권력과 집단 압력이 결합해 시민들이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만드는 것 자체가 이미 헌법 정신 훼손의 시작일 수 있다.

 

'탱크'라는 단어조차 자유롭게 사용하기 어려운 분위기로 사회가 흘러간다면, 그것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 헌법 가치 자체를 위축시키는 일이다.

 

과연 이것이 건강한 민주주의 사회의 모습인가. 민주주의는 원래 관용의 체제다. 실수와 이견,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허용하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이 정치적 성역이 되고 특정 진영의 영구적 도덕 면허처럼 기능하기 시작하면 사회는 점점 정서 동원 정치와 자기검열 속으로 빠져든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 심리는 놀라울 정도로 반복된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병들기 시작하는 첫 징후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어느 순간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조차 두려워하게 되는 순간이다.

탱크를 탱크라고 부를 수 없는 사회, 그것은 건강한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다.



출처 : 최보식의언론(https://www.bosik.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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