廣安沙場 憶初戀 (광안사장 억초련)
화순 송석정에서 광안리 백사장까지, 60년의 세월
오늘 낮, 서울에서 날아온 오랜 절친의 전화 한 통은 내 마음의 시계를 단숨에 60년 전, 눈부셨던 청춘의 한 페이지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내 어린 시절 고향은 전라도 화순. 맑은 지석천 변에 노송과 바위가 어우러진 송석정(松石亭)이 묵묵히 서 있던 곳이었습니다. 소풍을 가던 날, 솔바람 소리를 들으며 자연과 우주를 헤아리던 소년 소녀는 어느새 70 초로가 되어, 푸른 물결이 일렁이는 석촌호수 산책로를 나란히 걸었습니다. 자네가 환하게 웃을 때면 그 맑은 웃음소리가 내 마음속 가장 깊은 자리에 그대로 새겨지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홀로 광안리 백사장을 찾았습니다.
파도는 발끝을 스치며 장난을 치고, 바람은 자꾸만 머리칼을 흩날립니다.
우리가 남긴 만남의 발자국은 밀려오는 파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무심한 모래톱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석촌호수에서 들었던 자네의 그 맑은 목소리는 여전히 광안리 바닷바람 속에 스며들어 지금도 나를 흔듭니다.
친구의 전화를 끊고, 화순 송석정의 소나무 향기와 서울 석촌호수의 눈물, 그리고 광안리 백사장의 파도를 묵직하게 붓끝에 모아 한 자 한 자 한시에 담아봅니다.
廣安沙場 憶初戀 (광안사장 억초련)
- 광안리 백사장에서 첫사랑을 기억하며 -
獨步廣安細沙中 (독보광안세사중)
내 홀로 광안리 고운 모래 가운데를 걸으며
摹君容貌水涯東 (모군용모수애동)
물가 동쪽에 자네의 고운 얼굴을 그려보네
回頭舊事成流水 (회두구사성류수)
고개 돌려 보니 옛 일은 흐르는 물이 되었고
觸目新波隨長風 (촉목신파수장풍)
눈에 밟히는 새 파도는 먼 바람을 따라 밀려오네
浪洗沙痕情未盡 (낭세사흔정미진)
파도가 모래 흔적은 씻어가도 내 정은 다하지 않고
潮消畵面恨何窮 (조소화면한하궁)
조수가 그린 얼굴 지워버리니 이 아쉬움 어찌 끝이 있으랴
忽聞耳畔淸音響 (홀문이반청음향)
문득 귓가에 자네의 맑은 목소리 울려 퍼지니
怊悵人間萬事空 (초창인간만사공)
허무했던 인간사 만 가지 일이 한순간에 사라지네
60년의 함수를 넘어서는 영원의 시그마(∑)
廣安沙場 憶初戀 (광안사장 억초련)
화순 송석정에서 광안리 백사장까지, 60년의 세월
화순 송석정(ㅗ, ㅏ)에서 밝고 푸르게 꿈을 키우던 소년은, 서울 석촌호수(ㅜ, ㅓ)에서 가슴 시린 첫사랑을 만나 영혼의 가장 깊은 심연과 침묵을 선물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머무는 부산 광안리 바다는 그 모든 공간과 세월의 에너지가 흘러들어 완성되는 ‘인생의 통전(統全)적 바다’입니다.
광안리 백사장의 모래 흔적은 파도가 지우고 조수가 쓸어가도, 내 마음의 모래톱 주름에 담아둔 그 시절 자네의 맑은 청음(淸音)만큼은 지우지 못했습니다.
60년의 세월 동안 만사가 공(空)으로 돌아가는 허무한 인간사라지만, 내 유한한 몸 안에 이토록 무한한 마음의 궤적들을 품고 있으니 이 또한 실존의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밤, 화순과 서울을 거쳐 광안리에 닿은 세월에 잘 익은 주름살을 쓰다듬으며, 저 멀리 첫사랑이 살고 있을 성내천 하늘을 향해 홀로 따뜻한 찻잔을 들어 올립니다.
세월의 강물이 바다에 닿을 때
소나무 향기 아련히 흩어지던 그 날
시간의 수식 속에 갇힌 유한한 삶이어도
우리 가슴엔 영원의 궤적이 남았네
귓가에 머문 청음은 바닷바람이 되어 흐르고
광안리 저 멀리 시린 밤하늘을 향해
주름진 손으로 따스한 차 한 잔을 띄우네
